고종과 흥선대원군은 친일파였나요? 역사적 논쟁 완전 정리

고종과 흥선대원군을 단순히 '친일파'로 규정하기는 어려워요. 고종은 강화도조약 체결·개화 정책을 추진했지만 을사조약에 서명하지 않고 헤이그 특사를 파견했어요. 흥선대원군은 명성황후 제거 청탁·을미사변 협력 논란이 있지만 초기 쇄국 정책으로 외세를 배척한 행적도 있어요. 각 사건별로 구분해 평가해야 해요.

💡 이 글의 핵심  |  
고종과 흥선대원군은 친일파였나요? 역사적 논쟁 완전 정리

고종은 친일파였나? 개항과 개화정책 논쟁

고종은 1873년 친정 선포 후 1876년 강화도조약을 체결하며 일본에 개항했어요. 이를 두고 친일 성향의 근거로 드는 시각이 있어요.

개방파로 보는 시각
– 강화도조약 이후 신사유람단(1881), 영선사(1882) 등 개화 정책 추진
– 일본과의 교류를 통해 서구 문물을 수용하려는 근대화 시도
– 당시 청나라, 러시아, 일본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려 한 외교 전략

비판적 시각
– 불평등 조약인 강화도조약을 체결한 점
– 개항 이후 일본 세력이 조선에 급격히 확대됨
– 친정 이후 명성황후·민씨 일파가 실권을 쥐면서 친일 논란의 책임 소재가 불분명

그러나 역사학계 대다수는 고종을 ‘친일파’로 분류하지 않아요. 을사조약(1905)에 서명하지 않으려 했고, 헤이그 특사 파견 등 독립 유지를 위한 시도가 있었기 때문이에요.

📊 핵심 수치
1873년
고종 친정 선포
1876년
강화도조약 체결
1895년
을미사변(명성황후 시해)
1905년
을사조약 (고종 서명 거부)

흥선대원군과 친일 논란의 핵심 사건들

흥선대원군은 고종보다 친일 논란이 더 강하게 제기돼요.

친일 협력 의혹 근거
– 명성황후 제거 청탁: 일본 공사관에 명성황후를 제거해달라고 요청했다는 주장이 있음
– 을미사변 협력: 명성황후 시해 사건(1895)에서 일본의 행동을 묵인 또는 협력했다는 견해
– 군국기무처 참여: 일본이 개혁을 주도할 때 고종으로부터 군국기무를 위임받았다는 기록

반일 행적
– 집권 초기 척화비 건립, 서양·일본 세력 배척
– 쇄국정책으로 외세 침투 차단 시도
– 청나라에 납치(1882 임오군란 후)되는 등 외세에 피해를 입음

흥선대원군은 기회주의적 행동과 반일 행적이 공존해 단순 규정이 어려워요. 을미사변 협력 여부는 아직도 논란이 있어요.

친일파 판단 기준과 역사 해석의 차이

‘친일파’라는 개념은 단순히 일본과 협력했느냐가 아니라, 식민 지배를 위한 적극적 협력 여부가 핵심이에요.

친일파 판단의 기준
– 단순 교류·조약 체결 vs 식민화 협력·이익 취득
– 자발적 협력 vs 강압에 의한 행동
– 당시 시대적 선택지의 한계 고려

고종과 대원군은 일부 친일 성향 행동이 있었지만, 일제 강점기에 적극적으로 식민 지배에 협력하고 이익을 취한 이완용 등 전통적 친일파와는 구별돼요.

역사 해석의 문제
드라마 등에서는 흥선대원군=꼰대, 명성황후=친일파, 고종=우유부단으로 묘사하는 경향이 있는데, 역사학자들은 이런 단순화에 비판적이에요. 당시 청·러·일 3국 사이에서 생존을 위한 복잡한 외교가 필요했던 상황을 함께 봐야 해요.

📊 핵심 수치
고종
개항·개화 추진, 을사조약 거부
흥선대원군
쇄국정책, 을미사변 논란
이재면(장남)
은사공채 수령, 친일 수혜자
이완용
을사조약 서명, 친일파 대표

흥선대원군의 장남 이재면, 실제 친일파 논란

흥선대원군 본인보다 장남 이재면(1845~1912)이 실질적인 친일 이익 수혜자였어요.

1911년 일본으로부터 ‘은사공채’ 국채증서를 받았는데, 이완용보다 5배 많은 금액이라는 주장이 제기됐어요. 이재면은 왕족 지위를 이용해 일제로부터 경제적 이익을 얻었다는 비판을 받아요.

이처럼 흥선대원군 가문 내에서도 각자의 행적이 달라 가문 전체를 하나로 평가하기 어려워요.

고종과 흥선대원군을 친일파로 단정하기보다는, 각 사건별 행동과 당시 상황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는 것이 역사적으로 더 정확한 접근이에요.

자주 묻는 질문

Q. 고종이 강화도조약을 체결한 것이 친일 행위인가요?

강화도조약(1876)은 불평등 조약이었지만, 고종의 친일 의도보다는 당시 개화파의 영향과 시대적 압력으로 보는 시각이 많아요. 이후 고종은 헤이그 특사 파견, 을사조약 무효 주장 등 독립 유지를 위한 행동을 했어요. 개항 자체를 친일로 단정하기보다는 당시 외교적 상황 속 선택으로 봐야 해요.

Q. 흥선대원군이 명성황후 시해(을미사변)에 관여했나요?

흥선대원군이 일본 공사관에 명성황후 제거를 청탁했다는 주장과, 을미사변 당일 일본의 행동에 협력했다는 서술이 있어요. 그러나 강압에 의한 것인지, 자발적 협력인지는 역사학계에서도 논란이 있어요. 을미사변은 일본의 주도로 이루어진 범죄이며 대원군의 역할은 논쟁 중이에요.

Q. 드라마에서 묘사되는 흥선대원군·명성황후·고종 이미지가 역사적 사실인가요?

드라마에서 흥선대원군=꼰대, 명성황후=친일파, 고종=우유부단으로 묘사하는 경향이 있지만 역사학자들은 이런 단순화에 비판적이에요. 당시 청·러·일 3국의 압박 속에서 생존을 위한 복잡한 외교가 필요했던 상황을 함께 고려해야 해요.

Q. 흥선대원군 가문 중 실제로 친일 이익을 취한 인물은 누구인가요?

흥선대원군의 장남 이재면(1845~1912)이 1911년 일본으로부터 '은사공채' 형태로 이완용보다 5배 많은 금액을 받았다는 주장이 있어요. 대원군 본인보다 가문의 장남이 실질적 친일 이익 수혜자라는 비판이 제기돼요.